건강백과사전

제목: 정신과에 대한 오해
소제목: 마음에 대한 이해, 편견으로부터의 자유

날짜 :: 2004-03-09
전화번호 :: 031)380-3750
출처 :: 한림대학교성심병원 정신건강의학과

내용

중년의 A부인은 남편, 아들, 딸과 함께 아무런 걱정 없이 지내고 있었다. 그러던 중 믿었던 아들이 대학입시에 실패하였다. 온 가족이 실망하였고, 특히 정성을 쏟았던 A부인은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집 안 분위기는 이내 엉망이 되었고, 한동안 가족 내에서는 웃음이 사라졌다. 아들은 재수를 시작했고, 재수생활에 비교적 잘 적응해 나갔다. 딸과 남편도 시간이 지나면서 충격으로부터 벗어나 각자 자신의 일에 몰두하며 지냈다.

그러나 A부인은 시간이 지나면서 적응하기는커녕 점점 우울해져 갔다. 도무지 아들이 대학입시에 실패했다는 사실이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제각기 자신의 일에 열중하는 가족들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A부인은 아들이 실패한 것은 '자신이 잘못해서'라는 생각이 점점 들어 죄책감에 시달리게 되었다. 아무 것도 하기 싫고, 하루종일 누워서 지내는 일이 많아졌다. 입맛도 없고, 맛있는 음식을 보아도 먹을 수 가 없었다. 저녁에는 '아들이 혹시 또 실패하면 어떻게 하나?'라는 생각에 괴로워서 잠을 제대로 이룰 수 없었다.

가족들은 A부인의 이런 모습이 이해되지 않았다. 아들은 "내가 대학에 떨어진 게 그렇게 잘못된 일이에요? 다른 엄마들은 재수할 수 도 있는 거라며 위로하는데, 엄마가 그러고 있으면 내맘이 좋겠어요?"라고 화를 내는 경우가 많았다. 남편은 "괜히 유난 떨고 있다."고 핀잔주기 일쑤였다.

A부인은 점점 야위어 가고, 기운이 없으며,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하자 '몸에 이상이 생긴 것'이라고 생각하고 내과에 입원하게 되었다. 내과에서 내시경·심전도·혈액검사 등 여러 가지 검사를 했으나 이상소견이 발견되지 않아, 내과 의사의 권유로 정신과 진료를 받게 되었다. 정신과 의사는 A부인을 면담한 후 '우울증'이라는 진단을 내리고 치료를 권유하였다.

A부인은 '가족과 의논하겠다.'고 하며 치료를 보류하였다. 남편은 이런 이야기를 전해 듣고는 "세상에 그 정도 고민도 없고 가끔 우울할 때 없는 사람이 어디 있어? 내가 직장에서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는 줄 아는가?"라며 무시하였다. A부인은 너무 힘들어 도움을 받고 싶은 생각도 있었지만, 남편도 대수롭지 않게 이야기하고 애들에게 어머니가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다는 사실이 상처가 될 것 같아서 치료를 거부하였다.

가족들은 A부인이 단순한 걱정에서 오는 '불면증'이라고 결론 짓고 약국에서 수면제를 지어 주었다. 처음에는 효과가 있어 조금 잠이 오더니, 이내 별 효과를 보이지 않았다. A부인은 술을 먹으면 잠이 잘 올 것 같아 수면제와 함께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마시는 술의 양은 점점 늘어 하루라도 술을 먹지 않으면 잠을 전혀 자지 못하게 되었다.

A부인의 이야기는 정신과 외래에서 흔히 겪는 사례이다. 중년의 부인이 흔히 겪을 법한 스트레스. 흔히 보일 것 같은 행동일 수도 있다. 자식이 대학입시에 실패하면 기분 좋을 부모는 한 명도 없을 것이고, '좀더 잘 해줄 걸'하는 후회 한번 안한 사람도 거의 없을 것이다. 다만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치료를 받아야 하는 우울한 기분과 치료가 필요 없는 우울한 기분은 커다란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다. 여성의 경우 10명 중에 2명 정도가 평생에 한 번 우울증에 걸리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울증은 어쩌면 우리 주변에 흔히 존재하는 것일 수 있다.

환자들로부터 자주 받는 물음 중에 하나가 "제가 병인가요?"라는 질문이다. 이런 경우 답하기가 쉽지 않다. 어디서부터 병이고, 어디서부터 병이 아닌지를 구별하기도 설명하기도 곤란할 때가 많기 때문이다. '병인지' 또는 '병이 아닌지' 가 그렇게 중요할까? 어쩌면 더 중요한 것은 '내가 현재 불편하지' 또는 '불편하지 않은지'가 아닐까!

이런 면에서 정신과는 다른 과에 비해 매우 불리한 것 같다. 성형외과에서는 쌍꺼풀이 없는 게 병이 아니지만, 각자가 필요하면 비싼 돈을 지불하고 수술하는 경우가 많다. 또 우리는 소화가 며칠 잘 안되면 약국에서 소화제를 별 부담감 없이 사 먹곤 한다. 두통이 있으면 진통제를 먹기도 하고, 이런 경우 '내가 병인가' 또는 '병이 아닌가' 를 따져서 치료를 받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내가 현재 불편한가, 불편하지 않은가'를 따질 뿐이다.

그러나 정신과에서는 '병' 이라고 하면, "내가 멀쩡한데, 남들과 비슷한데, 내가 미쳤다는 말입니까?" 라고 한다. 꼭 '병' 은 아니지만 치료는 받는 게 좋겠다고 하면 "내가 병도 아닌데 왜 정신과 치료를 받아요?" 하는 경우가 많다.

모두 정신과에 대한 편견에서 비롯된 결과들이다. 엉뚱한 얘기를 하고, 머리를 산발하고 다니고, 이유 없이 실실 웃고 그래야만 정신과 치료를 받는다고 생각한다. 거꾸로 '정신과 치료를 받는다'고 하면 엉뚱한 얘기를 하거나 머리를 산발하고 다닐 것이라고 단정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끔은 경험하는 걱정·불안·의욕저하·기분변화 등의 증상은 그 심한 정도와는 상관없이, 이 때문에 자신이 얼마나 불편한가 와는 전혀 무관하게, '의지가 부족해서, 믿음이 약해서, 성격이 나약해서, 원래 내성적이고 소심해서'라는 말로 치부해 버린다. 그러니까 이런 증상들로 인해 불편할 때에는 엉뚱한 얘기를 하는 사람만(?) 치료하는 정신과의 도움은 받을 필요가 없고, 혹시라도 치료를 권유받으면 "내가 미쳤다는 말입니까?"라고 이야기한다.

이런 편견 때문에 A부인은 몇 차례의 치료기회를 놓쳤다. 우울한 기분·의욕저하·불면 등의 증상을 '괜히 유난 떠는 것' 이나 '성격이 좋지 않아서' 라고 치부하였기 때문에 기회를 한 번 놓쳤고, 가족들의 무관심과 정신과에 대한 편견 때문에 또 한 번의 기회를 흘려 버렸다. 그리고는 훨씬 더 심하고, 알코올 문제까지 섞인 훨씬 더 복잡한 상태로 악화되었다.

혹시 우리가 A부인의 경우처럼 편견으로 인해 효과적인 치료를 받을 기회를 포기한 적은 없었는지 모르겠다. 만약에 그랬다면 얼마나 억울하고 안타까운 일일까? 그러나 더 안타깝고 두려운 것은 A부인의 가족처럼 편견으로 인해 우리가 다른 사람의 치료기회를 박탈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도움을 받고 싶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삐뚤어진 시각을 두려워하여 치료를 포기하고 있다. 이제는 그들에게, 그리고 우리 자신에게 정신과에 대한 편견으로부터 '자유'를 줘야 할 때다.